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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마음속에 던진 파문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말뜻을 깨닫는 순간,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 기쁨을 느낀다. 왜 나는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다른 사람의 지식이 느는 것이 왜 나를 즐겁게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이유가 있다.

학생 시절. 내가 만났던 선생님들 중에는 실망스러운 분들이 많았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훌륭한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던 운 좋은 사람들도 있건만, 나에겐 그런 행운이 별로 없었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신 분들에게 이런 평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무척 섭섭해하실 것이다. 이제는 그분들의 고충도 이해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렸던 나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선생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좋은 선생님이 없었던 나와 친구들은 가르침을 받을 대상이 없다는 절망감을 늘 안고 있었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실망을 느끼는 경우는 교과서 한번 안보고 들어오는 불성실과 온당치 않은 이유에 의한 편애였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커서 선생이 되면 절대로 저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다져왔다. 선생이 된 지금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불성실과 편애로 기울려는 나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지만 남에게 기대하는 것처럼 내가 하기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대학과 유학 시절. 나에게도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따라갈 수 없어 보이는 지식의 깊이와 학문에 대한 사랑과 희망, 지식을 누구와도 나누는 여유와 열의를 보았다. 배움에 굶주려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가르침이 소중하고 감사한 줄 알게 되었다. 가르침에 대한 관심은 한 개인의 타고난 성격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 보다는 이러한 경험이 필요조건이 아닌가 싶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은덕을 후배들에게 전해주어야 그들이 과거의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물론 훌륭한 교육자가 이러저러한 동기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이란 일차적으로 깊이 있고 폭넓은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시키고, 그 지식이 발견되어 온 방식이나 원리를 알려줘 새로운 지식 낳는 법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교육자가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없다면 훌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선생을 바라보는 학생들은 그 이외의 측면을 지켜보고 있다. 즉 “선생이 얼마나 성실히 강의준비를 해오는가, 강의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는가, 강의 스타일은 얼마나 즐겁고 흥미로운가, 강의를 듣고 나설 때 무엇이 남는가,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주는가, 강의실 밖에서 선생의 모습은 어떠한가” 등등이다. 그래서 강단에 선 선생은 1인극 연기자의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학생들이 이러한 관심을 갖는 까닭은 가르친다는 일이 풍부한 지식을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연구자이면서 철저한 강의 준비를 하고 유머와 열정 넘치는 강의를 하는 실력과 성실함을 겸비한 선생이 있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교육자의 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나뉘지는 않겠지만 흔히 이러한 유형에 대비되는 스승상으로서 ‘귀감’의 대상이 되는 선생이 있다.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는 선생이라면 존경할만한 교육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좁은 의미에서 귀감이란 말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인 경우로 들린다. 또 가르침을 실제로 행하지 않아도 귀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모든 인류의 귀감이 된다”라는 말에서처럼 귀감 작용은 전혀 접촉이 없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이란 선생이 학생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주거나 모범을 보이는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 과거의 위인이 귀감의 대상이 될지언정 교육을 해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한편 내가 발견한 훌륭한 선생님들 중에는 앞의 경우와도 조금 다른 유형이 있었다. 바로 ‘영감’을 주는 분들이다. 그들은 화려한 지식 보따리를 안겨주거나 고매한 인품으로 멀리서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분들은 아니지만,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주는 선생들이다. 어떤 경우 이러한 가르침이 배우는 사람에게 인생을 바꾸어줄 정도의 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다시 내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가 과학자의 길을 걷도록 한 분이 있다. 그 분은 외할아버님이다. 초등교육도 못 받아 아무 배울 지식이 없는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어느 방학 날 시골 외할아버님 댁에 놀러 갔다. 어느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당에 할아버님께서 앉아 계셨다. 호기심에 달려가 보니 세수대야에 담긴 물 속으로 추가 매달린 실을 드리워 놓고 실 끝을 붙잡고 꼼짝 않고 계시는 것이다. 물어볼 엄두가 않나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30분이 지났을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내 몸의 기(氣)가 손끝에 모여 실을 타고 내려가 이 추가 움직이고, 물위에 파문이 인다!” 그때 나는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세계가 마음속으로 퍼져옴을 느꼈다. ‘기’라는 존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연에 대한 실험과 그 실험을 통해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자세였다. 오늘날 학생들은 진짜 과학실험을 보고 이런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때 내가 배운 것은 지식이 아니었고, 세상에 ‘연구’라는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점과 지식을 얻으려는 열의를 사람이 가지고 산다는 점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다. 베켄쉬타인이라는 천체물리학자가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원을 다녔는데 존 휠러라는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베켄쉬타인은 연구와 관련해서 휠러 교수와 한번의 면담을 가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 베켄쉬타인은 지도교수가 연구실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휠러 교수를 찾아갔다. 연구실에 들어선 베켄쉬타인은 휠러 교수의 책상 위에 물이 채워진 컵이 두 개 놓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휠러 교수는 한 컵을 들어 다른 컵에 물을 붇고 난 뒤, 갑자기 크게 뉘우치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방금 큰 죄를 짓고 말았네. 이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서 우주의 엔트로피가 증가했으니 말이네!” 그리고 그는 베켄쉬타인에게 논문 주제를 정하기 위해서 오라고 했는데 블랙홀을 연구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아무 말 없이 휠러 교수의 연구실을 나오던 베켄쉬타인은 문득 블랙홀에 열역학을 적용할 착상을 했다. 그 뒤 그는 블랙홀 열역학이란 새로운 학문 분야를 열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면에서 존경받는 교육자가 되는 일이란 전문적 성인(聖人)이 되는 것처럼 모순되고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실력형, 성실형, 귀감형, 영감형의 선생이 동시에 되기란 힘들 것이다. 교육자라면 그 중에서 실력과 성실함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리라. 그러나 가장 오래 남는 큰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찬 깨우침의 파문을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