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H. Dicke 와 일반 상대성 이론


Mercury, vol 23, No 4, p. 23의 글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글쓴이: Jack Zirker, 국립 태양 천문대
(c) 1994 Astronomical Society of the Pacific

디케

아인슈타 인이 틀릴 수 있을까? 오직 괴짜거나 매우 자신 있는 물리학자만이 20세기 중반에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했을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였던 Robert H. Dicke는 결코 괴짜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가장 앞서가는 실험학자 중 하나였는데 1950년대 중반까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경험적 증거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그 이론에 대해 엄격한 테스트를 수행했고 그 이론을 대신할 이론들을 개척해왔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20세기 물리학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칭송받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아이작 뉴턴과는 매우 다르게 중력을 설명하고 있다. 뉴턴의 의하면 공간은 "평평"(삼각형 내각의 합이 정확히 180도가 된다.)하고 시간은 당신과 당신의 시계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 지에 상관 없이 모든 곳에서 같은 비율로 흐른다. 무거운 물체들끼리는 각각의 "질량"(포함하고 있는 물질의 양)에 비례하는 중력을 가지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같은 이 질량에 반비례하는 가속도를 갖는다. 만약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움직인다면 서로 끌어당기는 힘의 변화는 무한한 속도로 전파되어 간다.

아인슈타 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매질(시공간), 4-차원 "장(field)"으로 합쳐져 있다. 시간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장소와 시계의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물체도 자연의 고정된 한계인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다. 이런 제한 조건들로부터 유명한 질량과 에너지 등가 원리, E=mc2이 유도 된다.

특별한 경우로서 특수 상대성 이론의 결과를 포함하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간이 질량이 있는 물체의 존재 때문에 휘어지게 된다.그 곡률은 그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 이런 의미에서 뉴턴의 평평한 공간의 중력이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일반 상대성 이론은 진실로 믿어졌다. 가장 잘 나간다는 물리학자들도 그 간단함과 철학에 매료되었다. 많은 젊은 이론학자들은 그 결과들에 매달려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몇몇 밖에 없었다. 그 몇몇 중 하나가 Dicke였는데 신화와도 같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동네에서 조교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방법에 있어서 현저하게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놀라운 물리적 직관과 진실의 표현 방법에 대한 미적 감각을 믿어 왔다. 자연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이론이라면 반드시 간단하고 명쾌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의 "실험"은 완전히 머리에서 이루어졌지만 물리 원리에 딱 들어맞아왔다.

디케는 그의 이론에 대한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측정하는 진정한 경험주의자였다. 그는 Missouri에서 태어난 남자답게 굉장히 의심이 많았다. 그는 이미 상대론을 검증하는 일로서 많은 명성을 얻었다. 1948년 조지 가모프와 그의 동료들은 중원소의 기원으로 오늘날 "빅 뱅" 이라고 알려진 가설을 제안했다. 뜨겁고 팽창하는 우주의 결과로서 원시 화구의 잔재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절대 3도에 해당하는 우주 배경 복사이다. 1964년 디케와 그의 학생들, P.J.E. 피블스와 D.T. 윌킨슨은 원시 화구를 검출하기 위해 마이크로파 안테나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이 벨 연구소의 마이크로파 안테나에서 알 수 없는 전파 잡음을 검출해 냈다. 디케와 그의 학생들은 그 잡음이 우주 배경 복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중에 펜지아스와 윌슨은 그 발견으로 인해 노벨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은 그 현상의 해석이 아니라 오직 그 발견에만 주어지기 때문에 디케는 단지 그의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기만 했다.

1950 년대 중반 디케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실험적 기반이 불충분하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론에서 세 가지의 정량적인 예측이 관측을 통해서 확인되었는데 어떤 것도 디케가 확신할만큼 정밀하지 못했다. 디케는 또한 그 이론의 철학적인 기반에도 의심이 생겼다. 그가 되묻기를 자연에서 왜  중력만이 입자에 의해 전달되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전자기력이 광자에 의해 전달되는 것처럼. 왜 물리학자들은 그 이론의 수학적 명쾌함에 그토록 감명받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이 믿었던 것처럼 자연은 오직 아름다운 이론만을 좋아하는 것인가?

 

수 성의 세차 운동

디케는 그 이론의 가장 확실한 증거였던 수성의 이상한 세차 운동의 정확한 예측을 다시 검증하기로 했다. 수성의 궤도는 100년 동안 5,600 초 만큼 세차 운동 한다. 뉴턴의 이론은 43초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디 43초의 차이를 정확히 예측했다. 다른 설명을 찾을 수 없을까 하고 디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정확히 구형이 아니라면, 빠르게 자전하는 핵 때문에 적도 부근이 팽창했다면, 수성에 미치는 조석력이 관측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수성의 운동을 제대로 설명하는 데 필요한 팽창부는 단지 0.1초지만 지구의 대기는 보통 태양 원반의 가장자리를 2초 또는 3초 정도로 흐릿하게만든다. 디케와 그의 학생들은 회전하는 focal-place 셔터를 장착해 잡음에서 오는 효과를 제거하는 특별한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들은 또한 외적인 잡음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1967년 힘든 일을 마친 후에 수성의 운동을 설명하고도 남는 태양 적도의 팽창을 발견했다.

이 결과는 이후 20년 동안 심한 논쟁을 가져왔다. 첫째로 몇몇 천문학자들은 디케가 태양 원반의 가장자리에 모여 있는 밝은 지역들, 즉 백반의 효과를 과소평가 했기 때문에 그의 결과가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디케는 비평가들의 기준에 따라 그의 데이터를 다시 분석했지만 그의 결과를 확신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론가들은 극 지방과 적도 지방의 단지 30도의 온도 차이 때문에 정확히 원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디케는 그런 온도 차이가 있다면 태양 내부의 에너지와 운동량 균형에 심한 문제점이 생긴다고 반론했다.

백반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디케는 그를 반격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정교한 분석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까지 얻게 되었다: 태양의 편평도 측정 결과로 인해 태양의 핵이 표면 자전 주기의 절반 정도인 12.4일의 주기로 자전한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논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데이터였다. 프린스턴의 대학원생들은 편평도 측정 망원경의 다른 버전을 만들게 되었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새롭게 태양 원반의 가장자리 밝기를 측정했다.

그 동안 디케의 전 동료이자 훌륭한 실험가였던 헨리 힐은 디케의 중요한 실험을 다시 해 보기로 결정했다. 1970년 초반 자신이 디케를 도와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자신의 망원경을 만들고 그의 학생들과 함께 태양이 정말로 납작해졌지만 태양 표면의 자전에서 예측되는 정도이고 수성의 이상한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전혀 안 된다는 것을 보였다.

힐의 상반된 결과로 인해 디케는 계속해서 관측을 수행하게 되었다. 해마다 그가 관측한 편평도가 변하는 것 같았다: 1996년에는 백만분에 45초에서, 1983년에는 18.3초, 1984년 단지 5.6초에 불과했다. 더구나 새로운 데이터에서는 12.4일 주기의 태양 핵 자전이 나타나지 않았다. 디케는 이런 엉뚱한 결과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곧 태양의 11년 주기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는 주장을 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측정 결과가 만족스럽게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대부분 천문학자들은 힐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다.

점차 디케와 그의 학생들은 태양의 편평도 측정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대신 태양 표면에서의 위도에 따른 적은 온도 변화에 집중했다. 태양 내부에 관한 중요한 사실(실제로 극 지방과 적도 지방의 온도 차이가 0.1도 난다)과 함께 재미있는 결과를 얻었지만 본래 알아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디케의 테스트에서 상처 없이 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 른 이론

중력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찾는 데 있어서 디케는 19세기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어니스트 마하의 추론에 영향을 받았다. 마하는  아인슈타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절대 진공 공간이라는 뉴턴의 개념을 맹렬히 비판하는 내용을 발표했었다. 마하는 또한 물체의 운동(그것의 관성 질량)의 변화를 일으키는 저항이라는 것은 매우 크고 먼 곳의 질량, 오늘날 생각하자면 먼 거리의 은하들로부터 작용하는 어떤 종류의 장거리 힘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생각을 불필요하게 복잡한 것으로 무시하고 국부적인 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디케는 마하의 생각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지만 실험을 통해서만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하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아인슈타인의 등가 원리의 확장을 반대한 디케와 그의 학생 칼 브란스는 1961년 중력에 관한 대체 이론을 발표했다. 브란스-디케 이론에서는 전 우주에 걸친 질량이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의휘어짐에 더해 각 지점의 중력의 세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분의 장(field)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 말은 즉 뉴턴의 중력 "상수" G가 공간 또는 시간적으로 상수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예측을 했다. 하나는 중력에 의한 별빛의 적색화 정도에 관한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함(E=mc2) 때문에 E만큼의 에너지를 가진 광자는 유효 질량 m을 갖는다. 광자가 별의 표면을 떠나면서 별의 중력 때문에 약간 끌어당겨 지는데, 즉 에너지를 약간 잃는다는 것이다 - "적색화(파장이 길어진다)"가 된다. 둘째로 먼 별에서 오는 광자가 태양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게 되면 태양의 중력 때문에 경로가 약간 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휘어짐은 개기 일식 때 관측된 바 있다.

브란스- 디케 이론은 차원이 없고 조정할 수 있는 변수, 오메가를  담고 있다. 오메가가 가장 그럴 듯한 값, 5가 되면 중력 적색 이동과 별빛의 휘어짐에 관한 이 이론의 예측값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예측하는 값에 각각 9퍼센트와 6퍼센트 정도 작은 값이 된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살아 남는가 하는 것은 이런 실험들의 정밀함이 철저히 개선되어야 알 수 있게 된다.

디케의 학생이었던 제임스 브롤트는 1962년 태양의 중력장에 놓여 있는 나트륨 스펙트럼 선들의 적색화 정도를 측정하였는데 일반 상대성 이론이 5퍼센트 이내로 맞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 R.V. 파운드와 그의 동료들은 1퍼센트 이내로 일치하는 결과를 얻었다. 결정 내의 붕괴하는 핵은 굉장히 좁은 에너지폭의 광자들을 방출한다. 파운드는 모스바우어 효과라고 불리는 이 방법을 사용해 지구 중력장에 놓은 테스트 탑을 통과하는 광자의 에너지 변화를 측정했다. 등가 원리에 기초를 둔 일반 상대성 이론은 높은 정밀도로 확인되었고 브란스-디케의 이론은 거북하게도 오메가의 큰 값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달 의 레이저 실험

디케는 주의 깊은 물리적 실험만이 일반 상대론의 논쟁을 결말지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1965년 그와 몇몇의 동료들은 달에 코너 반사경을 이용한 "광학 레이더"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코너 반사경은 세 개의 거울이 정육면체의 귀퉁이처럼 각각 직각으로 놓여있다. 코너 반사경은 어떤 방향에서 입사하는 빛이든 정확하게 입사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해낸다.

아폴로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 이런 반사경들을 설치하고 이런 반사경들이 달을 향해 쏘아진 강력한 레이저 신호를 작지만 검출할만큼의 신호로 반사해 내서 정확한 왕복 시간을 측정한다면 몇 미터 오차 이내로 달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측정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면서 달 궤도를 놀랄 만한 정확도를 가지고 알아내게 되었다. 계산된 궤도에서 벗어나는 정도는 상대론적 효과로 생각할 수 있겠다. 더구나 지구의 정밀한 크기와 모양을 밝혀졌고 시간을 측정하는 여러 천문학적 방법을 정확하게 검토할 수 있었다.

설치계획 은 1965년에 기금이 마련되어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 반사경을 설치하고 난 후에 릭 천문대에서 관측이 시작되어 후에 맥도날드 천문대와 할레아칼라 천문대에서 계속되었다. 달까지의 거리는 400,000km에서 40cm 정도의 오차로 매일 결정될 수 있었다. 관측이 계속되면서 이런 오차도 점차 줄어들었다.

아폴로 우주선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기 전에 몬타나 대학의 젊은 이론가인 Ken Nordtvedt는 만약 브란스-디케 이론이 맞다면 지구-달 사이의 거리는 29.53일을 주기로 9미터씩 변해야 한다고 예측했다. 이 효과는 달의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이 다를 때 생기는 효과이다. 따라서 달의 반사경 실험은 모든 물체의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은 같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시험할 수 있는 계기였던 것이다. 두 그룹에서 독립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같은 결론을 얻었다: 원리는 타당하고 아인슈타인의 추론 역시 옳은데 브란스-디케 이론이 포함하는 여분의 장(field)은 지구와 달 사이의 중력에 기껏해야 몇 퍼센트 정도만 기여한다.

이 시점에서는 디케보다 덜 관심 있는 과학자는 일반 상대론의 비평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디케는 계속해서 1980년 중반까지 태양의 편평도 실험을 계속했고 그가 밝혀냈던 알 수 없는 효과들을 끈질기게 연구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다수의 중대한 실험들을 통해 일반 상대론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빛의 중력 적색화는 이론의 예측 결과와 1퍼센트 오차 이내로 확인되었다. 퀘이사에 오는 마이크로파가 태양에 의해 휘어지는 양도 이론과 1퍼센트 오차 이내로 일치하고 있다. 행성을 향해 쏘아진 레이다 신호의 중력에 의한 지연 역시 일반 상대론의 새로운 증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쌍성 펄사의 자전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이론에서 예측한 중력파의 존재를 입증해 그 결과 조세프 테일러와 R. 헐스가 1994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만약 디케가 일반 상대론의 결점을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실망한다면 실험 상대론에 지대한 관심을 유발한 업적과, 모든 상대성 이론과 비교될 만한 이론적 뼈대를 만들어낸 것, 그리고 수많은 훌륭한 경험학자들을 양성해낸 업적에 만족하면서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창조적인 생각과 계속되는 노력의 인생에 있어 작은 결실만은 절대 아닐 것이다.